[언론에 묻는다. 尹 대통령의 아베 조문사(弔問辭), 한 줄의 비판기사 필요성도 없는가??]
2022.07.15.
'공자님 앞에서 경 읽기'. '번데기 앞에서 구름 잡기'. '족탈불급'(足脫不及,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함)을 뜻한다.
젊은 세대는 요즘 이를 '시체 앞에서 죽은 척하기'라고 한다.
지난 8일 피격 사망한 아베 신조(68.安信晋三) 전 일본 총리와 관련해 한 줄 쓰려는데 영 께름칙하다.
일본전문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필자가 논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전문가들은 물론 언론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듯해,
시체 앞에서 죽은 척하는 용기를 내보려 한다.
# 1. <아베의 '롤모델', 외조부 기시 노부시케 전 총리,1편>.
전후(戰後) 일본의 99대 총리 중에서 故 아베 전 총리 집안이 무려 9대를 차지한다.
아베는 90대, 96~98대의 4대에 8년 9개월 재임의 역대 최장수 총리.
그의 외증조부인 사토 에이가쿠(佐藤榮作)가 61~63대의 3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56~57대의 2대.
외무상을 했던 아베의 부친(아베 신타로), 중의원을 한 조부(아베 간)는 물론 해군 총장을 역임한 사토 총리의 형까지 이르면,
아베 집안이야말로 비교 불가의 '극강(極强) 정치 집안'이다.
이 가운데 아베 전 총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가 외조부 기시 노부시케 전 총리이다.
사토 에이사쿠 총리는 원래 3형제의 막내였다. 바로 윗형은 해군총장을 지낸 사토 이치로. 맨 위 형이 기시 노부스케이다.
그는 사토 가문에서 기시 가문으로 양자(養子)를 갔다. 사토 가문의 데릴사위였던친아버지의 본가로 보내진 것.
그는 양아버지의 친딸이자 장인의 사촌인 기시 로코와 결혼한다. 사토 노부스케가 아닌 기시 노부스케의 탄생이다.
# 2. <만주국'을 인연으로 '강철동맹'이 되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2편>.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의 역대 장수 3위의 총리이고, 일본 내에서의 인기는 높은 편이다.
8일 사망한 아베 전 총리가 외모부터 성격, 정치행태까지 외조부 기시를 빼다 박았다 해서 더 화제에 올랐다.
기시는 사실 한국에게는 '최악의 총리' 중의 하나이다.
필자 사견으로는 아베 신조가 역대 통틀어 '가장 나쁜 총리'이고, 기시도 순위를 다툰다.
35세 때 이미 만주국 산업부 차관이었고, 1940년대에 상공대신이 될만큼 전쟁 중 출세가도를 달렸던
기시는 전후(戰後) '극동국제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戰犯)' 판결을 받고 구속, 기소된다.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그는 운도 좋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국이 친미적이면서도 정치적 야심이 있는 인물을 찾던 중 기시가 눈에 띄었고,
이에 따라 그에게 면죄부를 주어 선거 자금까지 대주며 그를 키웠다는 설(說)이 있다.
그가 총리 말기인 1960년 1월 미국을 방문해 새로운 '미일우호조약'을 야당의 거센 반대 속에 통과시킨 것을 보면,
총리 재임 시 미국에 대한 보은(報恩)을 줄곧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시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인 1961년부터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는 만주국 장관을 거친 기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때까지 기시를 사부(師傅)처럼 모시고 찰떡궁합을 과시한다.
44살의 박정희는 1961년 8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명의로 21살 연상인 노정객 기시(당시 65세)에게 친서를 보낸다.
<근계(謹啓). 서신을 드리는 기회를 갖게 되어 영광입니다>.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탈취한 실권자 박정희가 일본의 막후 최고 실력자와 접선이 되는 순간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8월, 박정희는 기시에게 두번 째 사신을 보낸다.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위해 배전의 협조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친서에 대한 답에서 기시 전 장관은 "이럴 때일수록 아무 말 없이 손을 꼭 잡고 가자"고 다독인다.
이 친서의 전달자는 당시 최대 기업의 하나였던 화신백화점, 박흥식(朴興植,1903년생) 사장이다.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해국, 전범(戰犯)기업에 면죄부를 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계기로 활용한 친서였다.
그조차 반민특위(反民特委,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던 '특급 친일파'를 통해서.
세월이 좀 흘러 1970년. 한일 국교 정상화 5주년을 맞아 박정희는 한국정부가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격의 훈장인 '수교훈장 광화대장'을
기시에게 서훈(敍勳)한다. '만주국 강철동맹'의 위용(威容)이다. 만주군 출신은 한국 군부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박정희 외에도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을 비롯해 백선엽 김백일 신현준 등 만주군 출신 한국군 고급간부는 즐비하다.
일본 관동군사령부는 1932년 청(淸)나라 폐제(廢帝)인 푸이를 왕에 올리며 괴뢰 만주국(滿洲國)을 세워 종전 때까지 중국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관동군사령부와 만주국에서 헌신한 일단의 적극적 친일파 군인들이 해방 후 한국군 고급 간부로 임용되었다.
친일잔재 청산작업은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렸다. 민족정기는 더럽혀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장 지독하게 친일을 했던 이응준이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군의 아버지'라 칭해지며 현충원에 묻혀있다.
반민특위(反民特委)를 해체한 이승만 탓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국부론(國父論)이 횡행하고, '이승만 재평가'를 강력히 주장해온
극우 언론인(박보균, 68, 전 윤석열 후보 고문, 중앙일보 편집인)이 문광부 장관이 되는 나라이다.
# 3. <기시 노부스케 사족(蛇足), 애첩(愛妾) 장례를 위해 총리직을 6시간 정지하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기자들 사이에 인기가 있는 편이다.
필자는 청와대 해외언론비서관(김대중 정부)으로 일한 이후 지금까지 일본언론 한국특파원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의 기시 호평은 뜻밖에도 그가 낭만주의자라는 데 있다.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권번(券番)정치'보다 훨씬 심한 '기방(妓房)정치'가 존속해왔다.
유력정치인들에게는 대부분 게이샤(藝者, 일본의 전통적 기생) 애인이 있었다. 기시도 마찬가지였다.
기시가 총리 재임 중 게이샤 애첩이 죽었다.
기시는 각료회의 끝 무렵 "한 인간으로서 죽은 애인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며 '총리직 6시간 해촉(解囑)'을 요청한다.
그는 애첩의 영정(影幀)을 들었고 장례식을 마친 뒤 총리직에 복귀했다.
이를 모르는 일본 매체가 없었지만, 이를 보도한 신문, 방송도 없었다.
정치인의 허리 아래를 묻지 않는 언론관행의 나라가 전 세계에 둘 있었다. 프랑스, 일본. 이제는 프랑스만이 그 전통을 지키고 있다.
고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인 역정에서 최대 위기는 90대 총리(2006~2007년)에서 처절하게 실패한 뒤,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을 때였다. 언론은 그를 '철없는 애송이'라고 조롱했다.
이런 와중에 그는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선거에 도전한다.
아베는 외조부 기시 전 총리를 따랐던 후키다 아키라 전 자치상(2017년 작고)을 찾아간다.
"기시 선생은 강조하셨네. 정치인은 '완전 연소'(燃燒)를 해야 한다고. 재기해 완전 연소를 하면 어떨까?".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아베는 한발 더 뛰는 정치가로 변했고, 2012년 말 극적으로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아베의 피에 흐르는 정치가 DNA는 바로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것이다.
# 4. <아베 빈소 찾은 尹대통령의 부적절한 추모사. 언론은 왜 침묵할까?>.
지난 12일 오후 尹대통령이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 차려진 고 아베 신조(安信晋三)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尹대통령은 조문 후 방명록에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고 아베 신조 전 총리님의 명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적는다.
다른 건 모르겠다. 조문하는 판에 고인의 공과(功過)를 세밀히 따지지 않고 덕담(德談)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건 아니라고 본다. 아베가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는 말은 사실과 거리가 너무 멀다.
정치족벌의 황태자로 태어난 '선민'(選民)이었던 그의 정치적 뿌리는 한국병탄을 일으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코 다케모리(西鄕隆盛)와
조선정벌론 '백건서"(白建書)를 쓴 사다 하쿠보(佐田白若) 류의 '정한론'(征韓論)이다.
아베는 평소 "이토를 존경한다"고 말해왔다.욱일기를 하늘처럼 받들고, 전범 위패가 있는 신사참배를 떡 먹듯 한다.
이런 극우편향이 했던 일은 평범한 한국인에게 비수를 꽂는 잔혹사로 점철된다.
1. 한반도에 대한 일체의 식민지배를 사죄한 아키히토 일왕이나 오부치 전 총리 등의 "통절한 반성" 발언을 통째 부인했다.
오만방자가 끝갈 데 없었고, '인근 선린(善隣)정책"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2.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아베는 평소
"(전쟁 가능한 나라로의) 개헌은 필생의 과업"이라고 말해왔다. 10일 치러진 선거를 통해 개헌 발의 의석(166석)을 훌쩍 뛰어넘는 177석을 확보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총리는 개헌작업에 나서 아베의 유지(遺志)를 이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독도 영유권을 강변하고, 특히 "종군위안부는 강제동원한 성 노예로 조작해낸 것"이라는 망언도 했다.
"한국위안부들에게 사과편지 보낼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공언했다.
4. 안중근 의사의 할빈 의거를 단순살해범으로 폄하했다.
5. 반도체 소재 한국수출 제한조치를 합리화하면서 우리나라를 "약속 안 지키는 어리석은 나라"라고 비웃었다.
이러한 아베에게 아시아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는 헌사(獻辭)가 과연 가당한가?
언론은 왜 이에 대해 침묵하는 걸까? 이해되지 않는다.
# 5. 에필로그
검사 16명을 잇달아 요직에 쓰는 걸로 대표되는 그 처절한 연속 인사실패의 굉음(轟音)을 이 정부는 전혀 듣지 않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복사한 듯한 경박하고 반지성적인 대통령의 언어?
이 두 가지 때문에 이 정권은 출발 두 달여 만인 15일 대통령 지지율 32%의 '자멸(自滅)의 길'로 들어서 버렸다.
누구 탓도 아니다. 자업자득(者業自得)이다.
시작하자마자 종언(終焉)의 조기(弔旗)가 펄럭이기 시작한다.
오죽하면 50세도 안 된 변희재(48)로부터 "이 정권 2년 넘기기 힘들다"라는 험담을 들을까?
설화(舌禍)가 눈덩이(snowball) 쌓이듯 커져 이제 국민들이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오늘은 또 무슨 '말폭탄'(爆彈)이 터질까" 조마조마해한다.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한다.
2022년 2월 21일 이낙연 후보 캠프의 정운현(63.전 총리 비서실장)이
"괴물 대통령보다 식물대통령이 낫다"는 알쏭달쏭한 말과 함께 尹캠프로 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운현이 주군(主君)을 배신하고 적진(敵陣)에 투항한 우스운 사람이지만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분명히 있다고 느낀다.
'식물대통령'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언실련) 대표/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청와대 춘추관장/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