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중인 도장
사실과 진실, 저질과 악질
[전우용의 역사에서 읽는 지혜]
사실관계 분명한 대통령 비속어 사태
여권과 보수언론, '사실뭉개기'에 나서
권력의 사실조작...저질 넘어 악질로 가려는가
진실은 존재하는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미셸 푸코는 ‘지식이란 주체와 타자(他者)의 분리 및 양자 사이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담론으로서,
핵심 문제는 그 진실성이 아니라 어떤 담론을 진실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사회적 공모관계’라고 설파했다.
지식은 ‘알려는 의지’의 소산이기 때문에, 지식을 탐구하고 공유하는 자들의 사적 욕망과 환상, 목적의식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역사가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 서술이란 역사적 진리를 발견,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어떤 사실에 관한 기술을
역사적 진리라고 믿게 만드는 서사 구조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생각은 역사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학술논문, 신문기사, 다큐멘터리,
르포 등 작가가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이야기’에 통용된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세상에 유포되는 모든 이야기에서 ‘진실과 허위’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해지고,
사회적 공모에 의해 형성된 판단 기준이나 확증 편향에 영향을 받는 주장들만 남기 마련이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가 ‘지적(知的) 확신’의 시대였다면, 20세기 중엽 이후는 ‘지적 회의(懷疑)’의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지식이 진리에 가깝거나 그 일부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지식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 배척, 혐오했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진실들의 총합체인 ‘진리’는 남의 목숨은 물론 자기 목숨보다도 무거웠다.
그들은 수 천년 간 인간 의식을 지배한 종교적 전일주의(全一主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의 지식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 보고, 그와 다른 타자(他者)의 앎은 모두 반(反) 지성이나 야만으로 취급했다.
그런 신념이 집단 학대와 대량 학살을 정당화했다. 파시스트는 파시즘이 진리라고 믿었고, 볼셰비키는 볼셰비즘이 진리라고 믿었다.
역사의 사기꾼들
인종, 사상,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인간 내면의 악마성을 목도한 뒤,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리 또는 진실로 취급하는 어떤 것’들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실과 식민지 피억압민들이 인식하는 진실은 달랐고,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공존하려면 서로 다른 신념과 그 신념에 기초한 진실들의 공존을 인정해야 했다.
내 지식으로 해석한 역사와 현실만이 진실이라는 ‘지적 오만’에서 벗어나야 했다.
자기 지식을 거듭거듭 회의하고 타인의 지식에 마음을 열어야 했다. 갤브레이스가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로 정의한 것은
현대만이 그런 시대라서가 아니다. 어떤 앎이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 사조에든 부작용은 있다. ‘지적 회의’도 마찬가지다. 이는 본래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끝없이 회의하고 교정하라’는 권고지만,
자칫 반(反)지성주의나 지적 허무주의로 흐를 수도 있다. 어차피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면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지적으로 성실한 사람들이 거듭거듭 자기 지식을 재점검하는 한편에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단순무식한 교리를 체화한
지적 게으름뱅이가 대량생산되는 이유이다. 심지어 ‘거짓이라도 진실이라고 계속 우기면 결국 진실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생긴지도 꽤 오래 됐다. 지금 이런 ‘역사의 사기꾼’들은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런데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사실들 사이의 인과 관계나 그것이 작동하는 법칙을 확정할 수 없다는 뜻이지,
‘사실’을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을 ‘확정’할 수 없다면 법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주가조작 과정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실 관계도 확정할 수 있는데, A가 B를 때렸다는 사실, B가 A에게 욕했다는 사실 같은 것들은
‘지적으로’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들은 ‘직관(直觀)’으로 아는 일이며, 직관의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더라도
전후 맥락과 정황으로 충분히 검증할 수 있는 일이다.
비속어 사태의 당사자인 윤석열 대통령. '사실 뭉개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유례없는 해괴한 논란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미국에서 한 ‘사적 발언’을 두고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해괴한 논란이 진행 중이다.
공개된 동영상에서 나온 말소리는 내가 듣기에 분명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였다.
지인들도 모두 그렇게 들었다고 했다. 청력이나 청감이 나와 다른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저 말을 다른 말로 들었다는 사람의 ‘실물’은 본 적이 없다.
물론 다수가 동의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저 말이 나온 맥락과 저 말과 관련한 정황도 살펴야 한다.
장소와 발언 시점으로 보아 저 말은 “나는 의회의 파트너들과 협력해 글로벌 펀드에 60억 달러를 더 기부하려고 한다”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총평(總評)에 해당한다. 의회의 승인 여부가 걸린 문제는 60억 달러 중 미국이 부담하기로 한 50억 달리였기에,
의회가 승인 안 해주면 민망해지는 사람은 바이든일 수밖에 없다.
‘이 새끼’의 ‘이’는 자기 옆이나 자기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지시 관형사다. 당시 그 자리에는 미국 의원들이 여럿 있었다.
한국에 있는 야당 의원들을 욕할 의도였다면, ‘그 새끼들’이라고 했어야 한다. 정황도 이것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
대통령실이 취재단에게 ‘외교적 부담이 될 수 있으니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는 사실은 영상 공개 전에 먼저 알려졌다.
‘이 새끼들’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을 지칭한 것이고 바이든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외교적 부담 운운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도로 주워담을 수 없다. 일단 다른 사람의 귀에 꽂힌 말을 정정하려면 ‘본의 아니게 말이 헛나갔다’고 변명하거나
맥락과 정황을 들어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상대가 들었다고 믿는 말을 바꿀 가능성은 작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이 동영상이 보도된 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윤 대통령이 실제로 한 말은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날리면 쪽팔려서 어떡하나”였다고 발표했다.
여당의 몇몇 정치인도 번갈아 가며 자기 귀에는 ‘바이든’이라는 단어가 안 들렸다고 주장했다.
일부 유력 언론사는 ‘소리 전문가’들의 의견을 ‘익명으로’ 인용하는 형식으로 바이든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처음에는 ‘바이든’이라고 분명히 자막을 달았던 종편 방송도 ‘사실 뭉개기’ 작업에 동참했다.
그들은 맥락과 정황을 제거하고 문제를 ‘발음(發音)과 청음(聽音)’의 영역으로 축소하여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드는 데에 급급하다.
권력의 사실조작을 승인하는 순간
이 사건들의 발단이 된 ‘사실’은 분명하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두고 논의할 수 있는 문제는 그 발언이 대통령의 평소 성품과 언어습관 때문인지,
바이든이 48초 밖에 만나주지 않은 데 모욕감을 느껴서 돌발적으로 나온 것인지, 이 발언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할 것인지 등이다.
대통령실의 ‘변명’이 터무니없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진실 여부를 따질 문제도 대통령실이 ‘사실’을 조작하려 드는 것은 증거와 증언 조작에 익숙한 경험 때문인지,
그저 당황했기 때문인지 등 ‘인과 관계’에 관한 것들이다. 하지만 사실이 뭉개진 상태에서는, 진실에 관한 논의는 무의미해진다.
‘이 새끼들’이니 ‘쪽팔려서’ 같은 단어들은 사석에서라도 대통령이 입에 담기에는 너무 저질이다.
소리로나 맥락으로나 정황으로나 그 말을 했음이 분명한데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억지로 끌어다 대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대통령실의 대처도 너무 저질이다.
익명의 ‘소리 전문가’ 의견이라며 ‘바이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려 안간힘을 쓰는 언론사들의 행태도 너무 저질이다.
저질에 대해서는 혐오감이나 안쓰러운 감정을 보내면 그만이다. 그 저질이 ‘우리’의 문제라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하면 된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저질이 종종 악질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지금 정부 여당과 그 하수인들은 윤 대통령의 발언을 ‘사실 그대로’ 인지한 사람들을 청각 장애인,
정신 이상자, 사상범이나 되는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MBC에 ‘야당과 결탁한 좌파 언론’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한 말’도 ‘안 한 말’로 바꿀 수 있는 권력은 ‘안 한 말’도 ‘한 말’로 바꿀 수 있으며, ‘없는 일’도 ‘있는 일’로 바꿀 수 있다.
권력의 사실 조작을 승인하는 순간, 사람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의 직업을 빼앗고 정신을 좀먹고 있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같은 거짓말이 ‘사실’로 통용되던 시대로 되돌아가게 된다.
권력이 ‘사실 조작권’과 ‘진실에 대한 판단권’을 가진 사회에서는, 자기가 받지도 않은 돈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과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죽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시민들은 국민 대다수를 ‘청각 장애인, 좌파,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는 정부 여당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저질에 그칠 것인가, 기어이 악질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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