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중인 도장
'굥'석열 / 대통령의 말
시민언론 민들레 / 강미숙의 '궁리'
강미숙 시민소셜칼럼니스트
철학과 태도가 반영된 말과 글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 무게가 다르다. 국내외 언론이 24시간 대통령의 말에 집중하는 것은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외교안보, 경제 안보에 대한 언급은 국가의 존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대통령의 말이 갖는 무게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언어는 공식 연설문이든 느슨한 자리든 단 한마디도 허투루일 수 없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맥락을 거세한 채 일부분만 보도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르곤 하는데 대중들과 말로 소통해야 하는 정치인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소통이 더욱 중요해진 2000년대 이후 국민을 가장 당혹케 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단연 박근혜 씨다. 그는 ‘대박’ ‘적폐’ ‘혼이 비정상’과 같은, 대통령답지 않은 독특한 언어와 비문,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은 뜬구름 잡는 화법으로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나 현 대통령이 일방적이고 즉자적으로 내뱉는 언어의 부박함은 그녀와 비교도 안 될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후보 시절에 뱉어낸 말들은 차치하더라도 취임 후 9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책으로도 펴낼 수 있을 만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막말을 내뱉고 지금도 매일매일 국민의 잠자리를 불안하게 한다.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탄핵까지 갈 정도로 대통령의 말을 중시한 나라가 맞나 싶게 다듬어지지도, 공식적으로 검토된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운 무책임하고 심지어 국가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국제 외교무대에서의 언어도 그렇지만 국민을 향해 내뱉는 말의 심각성도 한참 도를 넘었다. 그런데 이를 지적하는 측근도 없어 보이고 언론은 태연자약하게 보도하며 전문가나 소위 사회원로라 하는 이들의 따끔한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정녕 대통령 한 사람의 것인가, 우리 사회가 그 정도로 허약한가 묻고 싶다.
대통령의 언어는 그 개인의 것이 아닌 정권의 것이고 나아가 국가의 것이라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매뉴얼이 되고 특히 권위주의적 대통령의 경우 토씨 하나가 강력한 신호가 되기도 한다. 화물 노동자나 조선소 노동자를 향한 대통령의 말에는 국민을 다층적으로 구분하여 대하는 태도가 드러나고, 야당 정치인이나 전 정부 인사들을 향한 말에는 범죄집단으로 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가, 강남역 침수 사건으로 사망한 모녀나 이태원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한 말에는 존중과 연민이 아닌 차갑고 형식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이나 기자들에게는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전문가 집단 앞에서조차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데 그 아래 공직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헌법체계가 성경에서 나왔다”거나 “퇴근할 때 보니 이미 침수가 시작되고 있더라” “노동자들의 파업은 북핵 위협과 같다” “국가는 소멸해도 시장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기도 하지만 전후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공감지수 제로, 또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나오는 즉자적인 언어구사력이다. 특히 ‘강력한 자위권’ ‘핵보유’ ‘확전’ ‘우월한 전쟁준비’ ‘압도적 대응’ 등등의 일련의 호전적인 발언들은 자신이 국군통수권자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장삼이사들의 술자리에서도 용납되기 힘든 말들이 일국의 대통령의 입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연일 쏟아져 나오면 국민들은 불신을 넘어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워낙 독불장군이어서 더 이상 그의 곁에 적확하고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이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 불행이지만 단순한 전달력 부족이 아니라는 점에서 국가와 국민 모두의 비극이다.
김은정, 강태완이 2004년 발표한 논문 ‘역대 대통령의 연설문에 나타난 수사적 특징과 역할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이 위기상황에서 ‘권력 행사’를 시사하는 언어를 구사한 비율이 박정희 49.6%, 전두환 34.0%, 노태우 13.2%, 김영삼 6,4%, 김대중 3.9%, 노무현 0.9%라고 한다.(‘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이 연구는 연설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국정철학이나 언어습관은 연설문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니 일상적인 공식 발언들도 수치는 비슷할 것 같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연설문이나 일상에서 ‘권력행사’를 시사하는 언어구사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아직 정권 초기이긴 하지만 같은 방법을 적용하면 역대급일 것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위주의와 천성적으로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천성적으로 권위주의적 체질이다. 권위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은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문가에게 배울 줄 안다. 그러나 현 대통령은 자신이 모른다거나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는 분야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모르는 분야에서는 거짓을 말한다. 전자는 진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 아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생각하지 않고 즉자적으로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김건희 씨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사건에 대해서는 아는 분야이기에 사실과 다르다고 거짓말을 하고, 북한 무인기 도발에 ‘드론부대가 없어서’라거나 ‘느낌을 적는 교과서를 만들라’는 말은 모르는 분야이기에 거짓을 말한 것이다. 모르면 알고자 하거나 전문가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데 검증받지 않은 주관적인 생각을 확신에 차서 말한다.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배울 생각도 없고, 전문가는 다 우스워 보이고 오로지 내 말만 맞다고 우기는 그의 말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라 ‘짐이 곧 국가’라 했던 절대주의 그 자체다. 더 큰 문제는 달라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말이 비판이 아니라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대통령에게나 국민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기자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웃기만 하는 박근혜 씨에게 “우리 가엾은 대통령님”이라 했던 오바마의 농담은 결코 농담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국가 위신과 신용도 하락과 직결된 일이었다. 땅에 떨어진 국민의 자존감은 두말할 것도 없다.
8명 대통령의 연설문을 통해 대통령의 언어 스타일을 영향력(카리스마), 진정성, 대통령다움, 인지적 복잡성, 여성성, 심리적 건강요인 등 6가지 지표로 분석한 논문, ‘대한민국 대통령의 언어스타일: 연설문에 나타난 언어적 특성과 심리적 특성’(김영준, 김경일, 2019)에 따르면 진보성향 대통령의 경우 영향력과 인지적 복잡성이 높고 더 여성적인 언어가, 보수성향 대통령의 경우 진정성과 더 대통령다운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트럼프가 그러했듯 전직 대통령 박근혜의 말은 이전 대통령들과는 다르게 예측하지 못한 말로 국가정책 책임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고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박근혜가 구사했던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혼이 비정상’ ‘구명조끼를 입었는데도…’라는 말은 지금도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대통령의 말은 그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숨 쉬듯 독서하고 연설문에 담는 메시지를 직접 챙기며 자신의 국정철학과 비전, 열정과 가치를 담아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경험한 바 있다. 여기에 문재인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낚시도 책으로 배웠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정으로 독서할 시간이 부족하자 조선시대 왕들이 경연을 한 것처럼 리더십 비서관을 두어 국내외 책이나 칼럼, 논문을 읽고 요약본을 보고하게 하여 코멘트하거나 질문을 통해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변화하는 흐름을 파악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연설문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자신의 철학과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효율적인 기회였기에 그 어떤 비유나 설명보다 정확을 기했다고 회고했다. 실로 늘 공부하고 사유하며 소크라테스의 표현대로 ‘검토하는 삶’을 살았던 대통령들이다.
덕분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며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라’는 김대중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노무현의 시민으로서 성찰과 각성, 책무를 강조하는 값진 어록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았다. 민주정부의 세 대통령 모두 술은 멀리했으나 술에는 해박했다고 하니 국정운영에 대한 진정성과 동시에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게 한다. 이런 지도자들을 경험한 국민에게 윤석열의 언어는 국민으로서의 자존감에 심대한 상처를 주고 정서적인 거부감을 넘어 국가안위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갖게 만든다.
장삼이사의 술자리인 양 매일같이 정책 담당자를 불안하게 하고 국민을 화나게 만드는 대통령의 말에 언제까지 속수무책이어야 하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했던 옛사람의 지혜를 빌려 말은 줄이고 귀는 더 열어놓으면 좋으련만 쇠귀에 경 읽기가 될 것이니, 머잖아 자신의 말이 만든 덫에 걸려들 것이 틀림없다. 오만의 다른 이름은 곧 파멸임을 역사가 증명하는데 안타까운 건 그 사이에 도탄에 빠진 국민의 삶은 어디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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