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중인 도장
이번에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이후에 ‘중립과 객관’이라는 포장 뒤에서 사실상 이재명 대표 구속을 은근히 부추기며 기대하던 많은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이 태도를 바꾸며 ‘거봐라. 내가 뭐랬냐’라는 식으로 온갖 정치(선거)공학적 평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결과를 두고 윤석열, 이재명, 한동훈 개개인이 어떤 도박을 걸었고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도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빠져있는 것은 과연 지난 2년 동안의 검찰의 ‘이재명 죽이기’가 정당한 행위였는지, 이번 영장 청구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이다. 이런 평가는 다시 체포동의안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았는지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빠지거나 건너뛴 채 체포동의안 가결은 단지 ‘영장 심사를 통해 혐의를 가려볼 기회를 얻자’는 현명한 제안이었던 것처럼 포장되고 있다.
따라서 영장 기각이라는 결과는 ‘현명한 선택이 낳은 반격의 기회’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에 바탕에는 ‘검찰은 공익의 대표자, 언론은 사회의 공기, 법원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교과서적 상식이 그 전제로 깔려있다.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부대껴온 많은 보통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그럴듯한 말뿐인지를 잘 안다. 이 말들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엉망이지는 않을 것이고 윤석열 정부가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번에 한국 사회의 기성 체제와 주류질서에 속한 다수가 이재명 대표의 구속과 민주당 리더십의 교체를 원했다고 보인다. 이것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바로 민주당 일부까지 동참해 가결된 국회 표결 결과이다. 또 조중동뿐 아니라 한겨레와 경향까지 보여준 태도다. 아마 한겨레와 경향은 ‘우리가 언제 이재명 구속을 원했냐?’고 할 것이다. 실제로 한겨레와 경향에 실린 모든 기사와 글들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한겨레와 경향의 지면 편집, 헤드라인, 사설 등을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은 주된 논조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겨레와 경향의 주된 논조는 민주당이 ‘방탄 정당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라고 비판하면서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을 지켜라’고 압박하는 점에서 조중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회 표결 이후에는 철저히 ‘이재명 체포동의 찬성’표를 던진 이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이해와 논리를 적극 대변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결국 핵심은 ‘지금과 같은 이재명 대표 체제로는 총선 승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번에 검찰의 손을 빌려서라도 대표를 교체하려 한 것이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체포동의안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의 입장을 한겨레와 경향은 대체로 ‘양심과 소신에 따른 투표’라고 포장해 줬다. 그리고 또한 조중동과 마찬가지로 가결파를 비난하는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들을 ‘비이성적인 팬덤’으로 묘사하는 보도를 계속했다.
이 보도들에 따르면 민주당의 강성지지층은 마치 ‘찬성표를 던진 의원을 향해서 신변을 위협하며 테러도 저지를지 모르는 광신도’처럼 묘사됐는데 이것은 ‘개딸의 범죄자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좌표를 정해서 낙인을 찍고 보복과 숙청을 주장하는 것은 이견을 존중하지 않고 공존을 거부하는 반민주주의’라고 비평했다.
이것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문제는 가장 심각한 좌표찍기, 낙인찍기, 보복과 숙청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고작 댓글과 문자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족벌언론과 정치검찰이 막강한 사회경제적 권력을 이용해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족벌언론과 정치검찰의 힘을 빌려서라도 다수 당원과 의원의 뜻을 거슬러 '이재명 대표 체제'를 끝내려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으로 ‘이견을 존중하지 않고 공존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민주당 지지자 일부의 분노와 과도한 반작용을 낳은 것이지 그 역이 아니었다. 사실, 이토록 족벌언론뿐 아니라 개혁언론들까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정치검찰이 낙인을 찍으면서 먼지털기를 했을 때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찾기 어려웠다. 검찰은 이번에 2년간 370번 가까운 압수수색에 이어서 1600쪽의 의견서와 500페이지 PPT까지 준비했다는데 사실 그 내용은 핵심이 아니었다. 엄청난 물량공세 자체가 사법부에 보내는 신호와 압박이었다.
주류언론의 한목소리와 '여론'과 집권 정부와 검찰이 보내는 강력한 신호를 무시한다는 것은 사법부 구성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고 경력, 승진, 출세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들이 이어졌고 이재명 대표 주변 사람들 24명이 구속돼 왔다. ‘민주노총에 간첩단이 있고 건설노조 활동가들은 건폭’이라고 언론이 쓰고 검찰이 영장을 청구하면 줄줄이 구속이 이어졌다. “영장 자판기”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사법부는 가장 보수적인 국가기구 중에 하나다. 좋은 학교 나오고 시험 잘 봐서 판사가 된 사람들은 학맥과 인맥과 혼맥 등을 통해서 사회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이것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구성원들이 대부분 ‘서오남’(서울대 출신의 50대 남성)이라거나, 서울대 법대와 검찰 최고 간부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없는 고위 법관 후보를 찾기가 더 어렵다는 현실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 최상층의 ‘상식과 여론’을 더 민감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사회에서 ‘지배적인 여론은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여론’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 심사가 있었던 9월 26일은 그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날이었다. 그날 윤석열 정부는 10년 만에 다시 대규모 군사 행진을 하며 사회 전체의 ‘군기’를 잡았고,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 7조가 헌법에 부합한다고 판결했다.
반면에 북한과 군사적 충돌 위협까지 일으키는 대북전단의 살포를 막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또 행정법원은 내부고발자인 박정훈 대령의 보직해임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즉, 기성 체제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윤석열 정부와 기득권 카르텔의 뜻’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날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재명 구속 기각은 누구나 예상했던 상식적인 결과라기보다는 예상을 깨는 예외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올해 초 윤미향 의원에 대한 정의로운 1심 판결이 그렇듯이 말이다. 당시에도 많은 이들은 기뻐하면서 ‘이제 반격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다. 조중동은 여전히 틈날 때마다 윤미향 의원을 마녀사냥 했고 한겨레와 경향은 윤미향 의원이 얼마나 억울한 공격을 당해왔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침묵했다. 민주당 지도부도 윤미향 의원의 복당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와 주류 권력자들은 노골적으로 사법부를 압박했고, 결국 최근 2심 판결에서 다시 ‘예외’는 ‘정상’으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윤미향 의원에게 억지 혐의들을 뒤집어씌우며 중형을 선고했다. 이제 국민의힘이 앞장서고 민주당이 타협하면서 총선 전에 윤미향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하려는 시도가 다시 시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이재명 대표는 윤미향 의원과는 좀 다르다. 집권까지 해 본 기성정당 중의 하나이고 당원이 200만 명이나 되는 민주당의 대표라는 점은 분명 유리하게 작용했을 차이점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득권 체제와 권력자들은 진보정당은 고사하고 민주당 수준의 개혁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민주당에서도 ‘변방’의 비주류였고 ‘공장 노동자’ 출신인 이재명에게 체질적 거부감을 보여 왔다.
따라서 민주당까지도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그 추종세력”으로 몰아가는 시도도, 검찰이 앞장서고 법원을 압박하며 ‘이재명 죽이기’를 통해 ‘윤석열 일극체제’를 만들려는 시도도 쉽게 중단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검찰 개혁이나 언론 개혁뿐만 아니라 당원들의 아래로부터 통제가 강화되는 민주당 혁신조차 발목 잡아 온 민주당 가결파(구주류)와 자유주의 언론들의 이재명 길들이기나 교체 시도도 계속될 수 있다.
‘윤석열 일극체제’가 아니라 ‘이재명 일극체제’를 더 크게 우려하고 있는 민주당 가결파와 자유주의 언론들은 이미 “당내 책임 공방은 무의미한 논란에 불과하다”(한겨레 사설), “가결표 색출, 징계 운운하며 내부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경향 사설)라며 지난 일은 덮고 넘어가자고 말하고 있다. ‘가결표를 던진 의원들을 솎아내려고 하면 당이 분열하면서 총선에서 필패할 것이므로 통합만이 정답’이라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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