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퇴장하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는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2024.3.1. 연합뉴스
'영수회담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는 듯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돌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 주에 용산 대통령실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재명 대표의 그간 10여 차례에 걸친 회담 요청을 갖가지 핑계를 들어 거부하거나 묵살하더니 4‧10 총선 참패 이후 '레임덕'이 현실화하며 벼랑 끝에 몰리자 취임 이후 거의 2년 만에 마지못해 손을 내민 모습이다. 이 대표는 최악의 경제 지표들이 증명하듯 도탄에 빠진 민생 해결을 위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를 수용했지만,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영수회담이 자칫 결정적 궁지에 몰린 윤석열 정권에게 정치적 활로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며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19일 대통령실 이도운 홍보수석의 브리핑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 30분부터 5분간 이 대표와 통화를 했다. 윤 대통령은 먼저 총선에서 이 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당선인들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이 대표의 건강 및 안부를 물었다. 이어 "다음 주에 형편이 된다면 용산에서 만나자"며 "일단 만나서 소통을 시작하고, 앞으로는 자주 만나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하고 또 통화도 하면서 국정을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윤 대통령이 마음을 내주셔서 감사드린다"면서 "저희가 대통령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고 이도운 수석이 전했다.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 등 인선이 빨리 이뤄졌으면 통화와 만남 제안도 빨라졌을 텐데 늦어진 감이 있다면서 그러나 한없이 늦출 수는 없어 통화를 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의 내주 만남 제안에 이 대표가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만나자"고 답했다고 전했다. 강 대변인은 "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제안을 환영한다. '민생이 어렵다'는 말로는 모자랄 만큼 국민 여러분의 하루하루가 고되고 지치는 상황"이라며 "여야 없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부디 국민의 삶을 위한 담대한 대화의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일단 환영과 기대를 담은 입장을 발표했다.
이날 통화는 윤 대통령의 이관섭 비서실장이 이 대표의 천준호 비서실장에게 오후 1시쯤 전화를 걸어 제안한 뒤 이뤄졌다.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짧은 통화에서 야당의 국회 인준이 필수적인 차기 총리 인선과 관련한 의견 교환은 없었다. 양측은 앞으로 회담 날짜와 의제, 배석자, 모두발언 공개 여부 등 구체적 방식을 두고 조율에 나선다.
이 대표는 대화 의제와 관련해 "민생회복 지원금 문제를 얘기할 것"이라고 직접 밝혔다. 이 대표는 이날 오후 유튜브로 중계된 당원과의 만남에서 총선 공약이었던 민생회복지원금(민생회복 긴급조치의 주요 내용으로 국민 1인당 25만 원 지급) 시행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윤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며 "한번 보자고 해서 만나자고 했다. 그때 얘기를 나누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민생경제 회복 노력이 이번 국회에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또 "제도 개혁, 개헌 문제도 여야 간 대화가 가능하면 최대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면서 "이채양명주(이태원 참사, 채 상병 순직, 양평 고속도로 의혹, 김건희 씨 명품백 수수 및 주가 조작 의혹)를 포함한 정권의 실책에 대한 진상 규명이나 제도적 보완도 해야 한다. 위대한 대한민국을 되찾는 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추경(추가경정예산)을 통한 서민과 소상공인 지원 방안 등 민생 대책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권을 둘러싼 각종 부정‧비위 의혹 사건도 회담 의제로 꺼낼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이 대표가 구상하는 의제들을 성의 있게 수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정권의 존립을 뿌리째 흔들 수도 있는 게이트급 사건들은 물론, 야당이 주창해왔던 민생 지원책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은 '포퓰리즘' '전체주의' '마약' 등의 표현을 동원해가며 색깔론적 매도에 급급해왔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무분별한 현금 지원과 포퓰리즘은 나라의 미래를 망친다"면서 "경제적 포퓰리즘은 정치적 집단주의와 전체주의와 상통한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미래에 비추어 보면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사실상 이 대표를 겨냥했다. 여당의 총선 참패에 대한 첫 입장을 밝히는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영수회담은커녕 두루뭉술한 협치라는 말조차 단 한 번 꺼내지 않았다. 2022년 8월 민주당 당대표 취임 직후부터 줄기차게 영수회담을 요구해왔던 이 대표가 총선 이틀 뒤인 지난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의 근본이 대화와 타협인데 (윤 대통령과) 당연히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 지금까지 못 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국정을 책임지는 윤 대통령에게도 야당의 협력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라며 또 다시 회담을 제안했을 때도 대통령실은 이렇다 할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그 나흘 뒤인 16일 기자들과 만나 영수회담 가능성에 대해 "모두가 다 열려있다"면서도 "국회는 5월 말 새롭게 열리고, 이후 원 구성이 된다. 그러면 어떤 시점이 국회와 소통하기 적절한지 생각해야 한다"고 22대 국회 원 구성 이후로 시점을 멀찍이 설정했다. 게다가 "야당과 소통할 때도 늘 여당이 함께 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아직 여당의 지도체제가 완전히 갖춰진 것은 아닌 것 같아 여당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최소한의 물리적인 시간은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해 사실상 회담할 뜻이 없으면서 이런저런 애매한 변명만 둘러대는 것으로 비쳤다. 윤 대통령은 제1야당 대표와의 단독회담에 대해 본인이 직접 부정적 의사를 드러낸 적도 있다. 지난 2월 7일 방송된 KBS 신년 대담에서 그는 "영수회담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제 없어진 지 꽤 된다. 여당 지도부를 대통령이 무시하는 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었다"며 "제가 우리 당의 지도부를 배제하고 야당 지도부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집권 여당 지도부와 당을 소홀히 하는 처사"라는 기묘한 논리를 내세웠다. 여당에서는 윤 대통령의 의중을 받들어 "범죄 피의자와 무슨 대화냐"는 적나라한 주장을 해왔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뒤늦게나마 태세를 전환한 것은 자신의 '정신 승리'와는 달리 정권 심판의 민심이 갈수록 더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 일차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총선 직후에도 '사과'와 '협치'를 등한시한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친윤 보수언론조차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는 등 국민적 질타가 쏟아졌다. 곧이어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평가, 즉 지지율이 20%대 초중반으로 폭락했다는 여론조사가 속출해 윤 대통령이 '조기 레임덕' 상태에 돌입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국정 방향은 옳았다"고 자화자찬하며 가던 길 그대로 가겠다던 윤 대통령의 둔감한 현실 인식에도 비상등이 켜졌을 법하다. 총선 대패 이후 쑥대밭이 된 국민의힘에서 여러 아우성이 나오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이제 야당 대표와 만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한 것도 압박감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192석을 가진 거대 야권이 '반윤 전선'을 본격화하게 될 날이 머지않아 그간 '가상 현실' 속에 취해 지내던 윤 대통령에게도 '실제 상황'으로서 위기감이 엄습할 수밖에 없다. 특히 본인과 김건희 씨를 정조준한 각종 특검법과 국정조사가 예고돼 있어 대야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절박함이 커졌을 것으로 관측된다. 민주당을 비롯한 6개 야당은 우선 '채 상병 특검법'(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을 21대 국회 임기 중인 5월 2일쯤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만약 윤 대통령이 또 다시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탄핵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경고한 상태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는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동조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어 윤 대통령의 거부권이 무력화되거나 실제 탄핵소추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차기 총리 인선 문제 또한 야당이 국회 인준의 열쇠를 쥐고 있다. 정권이 난파선인 상황에서 총리직을 맡겠다는 인물도 거의 없어 인선 작업이 표류 중인데 아예 이 대표에게 추천해달라고 공을 넘기거나,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 내정자가 있다면 사전에 찬반 의사를 떠볼 수도 있다. 여러모로 윤 대통령은 제1야당 대표와의 정치적 '딜'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구를 찾아 윤 대통령이 꺼낸 영수회담 카드가 정국 판도를 극적으로 바꾸기라도 할 것처럼 보수 언론들이 희망 섞인 포장을 하고는 있지만 의제 선정 과정에서부터 난항을 겪을 소지가 다분하다. 대통령실의 속내를 다각도로 간파하고 있을 이 대표와 민주당 측에서 총선 민의를 저버리거나 핵심 쟁점을 양보하며 윤 대통령의 들러리 역할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이채양명주' 등 현안을 두고 대립하다 협상이 결렬돼 회담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윤 대통령이 그간 보인 시대착오적 인식과 기만적 행태로 볼 때 민생 대책 등에서 실질적인 성과가 도출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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