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超)연결 지능사회’를 증명한 선거
야권의 압승으로 끝난 이번 선거를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중도층은 물론이고 보수 일부까지 윤석열 정권 심판에 참여하는 현상을 주목하는 상황적 해석이 있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세대 구성의 변화에 따라 보수 우위가 무너지는 사회변동을 주목하는 구조적 해석도 눈에 띈다. 표층적인 해석이건 심층적인 해석이건 너무 나갈 필요 없이, 윤 정부가 워낙 무도하고 오만하니 이럴 수밖에 없다는 간편한 해석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무서운 민심에 경악하며 할 말을 잃는 경우도 많다. 사실 말이 선거지 이번 선거는 무도한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항쟁에 가까웠다. 촛불이 투표용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 일리가 있는 저마다의 관점이겠으나 이번 선거는 우선 완충지대(buffer zone)가 없는 선거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우선 출마자 숫자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었다. 과거 18~20대 총선 양상과 비교해 보면, 담벼락에 빨주노초파남보로 형형색색 이어지던 후보자 벽보의 길이가 크게 줄었다. 과거에는 어느 지역을 보아도 대략 6~7명 후보자가 출마했던 데 반해 이번에는 4명 넘는 출마자가 있는 지역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점이 전국의 유세장을 돌며 필자가 가장 궁금한 대목이었다.
그 많던 출마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민주주의가 다양성을 표출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기이한 일이다. 아마도 선거 본선에 이르기 이전의 여론 형성 단계에서 후보자가 걸러지거나 정리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제3지대 중에 20대 총선에 70명을 지역 후보로 내보냈던 정의당은 22대에서는 17명으로 그 숫자가 크게 줄었다. 개혁신당도 지역 출마자는 30명 선에 머물렀다. 조국혁신당은 아예 지역 출마자가 없었다. 지역구에서 중간 지대가 사라지면서 선거의 의제도 정권 심판이냐, 야당 심판이냐로 지극히 단순해졌다. 이는 제3지대에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완충지대 사라지고 서울-지방 간 여론 형성 시차도 없어져
완충지대의 실종과 함께 여론 형성에 있어 수도권과 지방 간의 시차도 없어졌다. 과거에는 수도권에서 선거 의제가 형성되면 그 파도가 지역으로 전파되는 데 일종의 굴곡이 있었다. 중앙 방송에서 부각된 이슈를 지역의 논객들이 재해석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수도권과 지역에서 동시에 같은 의제가 부각되기도 하고, 심지어 지역이 수도권보다 의제 형성에서 더 빠른 경우도 있다. 대파가 일깨운 물가 고통을 말하는 데는 경기도가 서울보다 강력했다. 몸이 아픈 집안의 어른을 걱정하는 데는 의료가 취약한 충청도가 경기도보다 더 분노했으며 이로 인해 정권 심판여론도 충청도에서 더 강하게 결집되었다. 이제 지역은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정치의 중심 의제를 밀어 올리는 부력을 보여 준다. 4월 초에 수도권에서 정권 심판여론이 대세를 형성하던 시기에 낙동강 벨트로 불리는 국토의 동남 지역에서 역풍이 부는 데도 시차는 거의 없었다. 전국의 지역이 서로 관찰하고 경쟁하면서 민감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구도다.
지역의 굴곡이 없이 평평해진 선거판에서는 정치학자 노이만이 말한 강한 ‘의견 분위기(opinion climate)’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형성된다.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사통계적 감각 기관(a quasi-statistical sense organ)은 여론의 향방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구분하는 능력(quasi-statistical ability)을 유례없이 발전시킨다. 다양해진 매체와 소통의 수단들은 더 똑똑해진 시민사회에서 사회적 주류 이론을 순식간에 형성해 나아가는데, 그 양상이 과거에는 작은 돌풍이었던 흐름이 이제는 완충지대 없이 순식간에 태풍으로 나타난다. 최근의 기후 변화 양상과 유사한 것이다.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이번 선거만이 아니라 다음 총선에서도 여권이건 야권이건 과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200석 신화’가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이제는 정보가 아니라 지능이 말하는 초연결 시대다. 정보화 시대가 돌풍이라면 지능사회는 태풍이다. 1%만 승리해도 되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인 한국에서는 그 폭발력이 더 크다. 이런 현상은 지난 태국의 선거에서도 인상적으로 표출된 바 있어 한국 사회만의 특징도 아니다.
정권 심판 넘어 사회권 회복이란 시대정신 살리는 계기
그러면 고민이 생긴다. 야권은 이 압도적 의석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정권을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192석은 커다란 자산이자 동력이다. 그러나 이 의석이 시대정신을 감지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그 역시 재앙이 될 수 있다. 이번 선거는 단순히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윤석열식 가치체계에 대한 심판으로 나아가야 한다. 윤 정부는 정치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죄악으로 취급하는 신자유주의의 기조를 중심으로 작은 정부를 구현하며 기업가의 자유를 최고선으로 삼아 왔다. 여기에 역행하는 노동조합을 척결하고 규제와 세금을 대폭 줄이는 시장 경찰로서 정부의 기능을 설정했다. 심지어 정치에서 다수를 만들어 이익을 도모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종 사회 집단과 단체도 시장의 적으로 본다.
이는 1973년에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고 기업가의 나라로 나아가고자 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과 매우 유사하다. 피노체트 독재를 보고 감탄한 경제학자 하이에크를 비롯한 일련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영국의 마가렛 대처와 미국의 도널드 레이건을 교육시켜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다. 민주주의마저 위축시키며 기업가적 자유를 외친 이들이 한국에서 윤석열 정부로 부활한 셈이다. 다행히도 윤석열 대통령이 대처 수상이나 레이건 대통령처럼 유능하지는 못해서 조기에 심판을 당하고 있지만 이번 선거는 윤석열식 자유권을 대체할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서 시민의 사회권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선거 말미에 조국 대표가 이를 희미하게 사회권을 꺼내며 7공화국을 언급한 것은 그나마 시대정신이 사라진 선거에서 제법 울림이 있다. 자유권과 사회권의 충돌이라는 선거에서 가치의 충돌은 선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밑그림에 대한 거대한 논쟁의 신호탄이다. 사회권이란 윤석열의 자유권과 반대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국민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다. 특히 기후 위기의 시대에서 녹색 전환이라는 문명적 의제를 더 이상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수용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 기업의 자유권과 시민의 사회권을 어떤 방법으로 조화시키고 균형을 이룰 것인가에 향후 한국 사회의 명운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시민적 가치 정립 위한 연합과 협치의 정치
문제는 192석에도 불구하고 과연 야권에 시장 만능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회복의 요구에 맞도록 사회의 규칙과 제도를 수정할 수 있는 정책 역량과 비전, 유능한 전략가들이 준비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이 점은 박근혜를 탄핵하고도 한국사회의 거대한 퇴행을 막지 못한 문재인 정부에서의 미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무도한 권력을 탄핵하기만 하면 민주주의는 저절로 올 것이라는 안일한 지성이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켰다는 과거의 교훈을 과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느냐도 짚어볼 문제다.
윤석열 정권에 대한 경고의 심판 이면에는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적 가치를 정립하는 보다 중요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이를 위해 민주당은 모든 야당 및 사회단체와 연합의 정치를 준비해야 한다. 지난 문재인 정부가 소위 친문으로 알려진 계파의 독식으로 한국판 뉴딜 연합이었던 다수파 연합을 깨고 소수파로 전락했던 과정을 되새긴다면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명실상부한 우리 사회의 다수파 연합을 도모할 수 있는 차별성을 보여 줄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번 선거에서 연동형 선거제를 채택하고 비례연합당을 만든 것은 일견 진일보된 시도로 여겨지지만 22대 국회에서 정치개혁에 관한 한 민주당의 분발이 요구된다.
22대 국회 초반은 야권 전체가 윤석열 정권의 김건희 여사 추문들, 채 상병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한 국회 특별검사제 도입을 위해 공조하는 시기다. 아직 윤 대통령 탄핵에 대한 공조는 개혁신당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두 개의 특검에 대해 야권의 공조는 확실해 보이는 22대 국회에서 야권은 확실한 실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더불어 벼랑 끝에 내몰린 민생을 살피고 돌봄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야당 대표들의 상시적인 정책협의와 연석회의를 정례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민생 문제에 책임 있게 대처하는 야권의 의지를 결집하게 되면, 다음 선거를 향한 협치와 연합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제시하며 최종적인 정권 심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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