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MBC를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이명박-박근혜 집권 시기의 MBC 보도가 공정했는가 조사하는 일이었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고 뒤에서 욕이나 먹는 일이라 다들 꺼리는 자리였지만, 이명박-박근혜 시기를 거치면서 MBC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한 지경이라 불공정의 실상과 원인을 밝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고 재발 방지와 신뢰 회복을 위해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맡고 보니 태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보도의 공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였다. 내 눈에는 저 보도가 불공정한 보도이고 편파적인 기사로 보이는데, 보도를 한 기자나 취재 지시를 한 상급자가 그건 당신의 주관적인 판단이고 나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면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지루한 논쟁만이 이어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다 문득 몇 해 전에 미드 ‘뉴스룸’을 보면서 ‘아하, 저런 게 진짜 언론 윤리이고 취재와 보도의 준칙이로구나!’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복수의 취재원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익명이 아니라 실명으로 보도하고 취재원 보호는 어떨 때 왜 필요한지 등 언론 윤리가 작동하는 장면이 그 드라마에는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기자로 일했던 MBC에선 87년 민주화 이후 언론사에서는 가장 먼저 ‘민주적인’ 노조가 발족했고, 노조가 주축이 되어 공정한 보도를 담보하기 위한 내부의 장치들이 속속 마련됐었다. 방송강령도 그렇고 취재와 보도준칙이 그러했다.
고백한다. 언론 윤리라는 게 있다는 건 그전에도 알았다. 그러나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을 뿐, 언론 윤리를 구체적으로 살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언한다. 한국의 기자들 중에 언론 윤리를 한 번이라도 읽은 기자들은 몇이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러했으니까. 장담한다. 언론 윤리를 제대로 지킨다면, 조선일보 정치면의 절반 이상은 공백이거나 시커멓게 칠해져 있을 것이다.
징벌적 배상이 도입되면, 기자들이 위축되고 언론자유에 제약이 따를 거라고 한다. 징벌적 배상을 도입하는 언론중재법에는 ‘언론 재갈법’이라는 악마의 프레임을 씌운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언론 윤리를 성실하게 준수하면, 징벌적 배상은 걱정할 일이 없다. 징벌적 배상의 대상이 되는가를 따지는 근거와 기준은 언론 윤리밖에 없다.
'언론 징벌적 손배제'를 반대하는 내용을 실은 한겨레 6월6일자 사설.
따라서 언론 윤리만 성실하게 준수하면 징벌적 배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징벌적 배상이 도입되면 사주가 있는 언론사일수록 기자들을 대상으로 언론 윤리 교육을 강화할 거다. 자칫 언론 윤리를 지키지 않은 나쁜 보도로 자식들에게 상속으로 물려줘야 할 소유물로서의 언론사가 징벌적 배상으로 기둥뿌리가 뽑힐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일이 생길까 사주들은 기자들을 볼 때마다 언론 윤리를 반드시 지키라고 잔소리를 해댈 거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징벌적 배상은 사주가 있는 언론사는 물론이고 권력의 입김이 작용하는 공영방송에 이르기까지 ‘부당한 외압’으로부터 기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기자가 ‘기레기’가 되고 권력의 ‘애완견’이 되는 걸 방지하는 ‘기자의 양심 보호법’이라고 믿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일부 언론의 기자들을 향해 ‘검찰의 애완견’이라고 했다고 하여 화제다. 언론에서는 ‘논란’이라고 쓰지만, 나는 그렇게 쓰고 싶지 않다. 애완견이라는 표현에 기분 나쁜 기자들이 많겠지만, 국민 다수는 그렇지 않다. 기레기를 기레기라 부르고 애완견 노릇을 하니 애완견이라 하는데 그게 왜 논란이냐는 거다. 고기를 씹었더니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였을 뿐인데, 어찌하여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어린 장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 국민의 표정이 그러하다.
현역에서 퇴직한 지금 나는 언론 현실을 걱정하는 퇴직 언론인들의 모임에서 작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모임에 있는 선배들은 빈한하게 살아도 언론자유의 깃발을 떠나지 않은, 기자로서의 양심을 지킨 언론인들이다. 한겨레를 창간할 때 벽돌 한 장이라도 쌓아 올린 선배들이고, 진보 언론의 맏형으로 한겨레가 성장하는데 청춘을 바친 선배들이다.
그 모임의 단톡방에서는 가끔 한겨레에 대한 절망에 가까운 실망과 언론의 현실에 대한 깊은 탄식과 분노가 터져 나오곤 하는데, 어제(6월18일) 나온 한겨레 사설 “이재명 ‘대북송금’ 기사에 ‘애완견’ 발언, 부적절하다”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 탄식과 분노는 이런 거다. 한국의 언론 상황에서 ‘애완견’이라는 용어가 거친 표현이고 부적절한 표현인가? 한겨레마저도 수구세력을 대표하는 언론과 똑같이, ‘애완견’ 표현을 쓴 이재명 대표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가?
얘기가 길어졌다. 이 글을 쓰는 건 내가 속한 모임의 단톡방에 한겨레와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이 있는 선배의 글을 민들레의 ‘깨어있는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일부만 발췌하여 옮긴다.
“한겨레나 경향이 이른바 대북송금 대납 의혹사건에서 뉴스타파만큼 오직 진실을 드러내려는 집념과 용기를 갖고 심층 취재하거나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처럼 이 사건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검찰의 사건 조작 의혹을 끈질기게 부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많은 민주시민들이 바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럼에도 그런 열망에 결코 부응하지 아니하였음을 자인하고 있다면, 과연 이런 사설을 유체이탈 수법으로 쓸 수 있었을지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사설이 지적하듯이 이재명 대표만큼 검찰과 언론에 의해 일방적으로 핍박과 수난과 집단린치를 당한 유력정치인이 있을까요?
이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의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파괴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만큼 한겨레나 경향 같은 자칭 진보언론들은 바로 이 점에서 이재명 사건을 (이재명에 대한 정치적, 인격적 호불호를 떠나) 보다 심각하게 바라보고 보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선언대회 모습. 한겨레 아카이브.
한겨레의 사설은 소송 중인 사건의 진실은 법관들에 의해 시시비비가 명확하게 가려지고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소박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후의 역사는 그러한 소박한 신념을 여지없이 짓밟고 배신하는 사례들로 가득합니다. 조봉암 보안법위반 사건,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건, 인혁당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한명숙 뇌물 사건,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조국·윤미향사건 등은 말할 것 없고, 한겨레 사설에서 지적하는 이재명 사건, 이화영 사건 등등,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이 검찰과 경찰, 보안사, 중정 등에 의해 조작돼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희생과 수난을 겪었습니다. 한겨레 성원들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사설에서처럼 한가로운 논리를 펴지는 못할 겁니다.
사실과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의 존재 이유는, 특히 한국에서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런 우리의 참담한 역사가 웅변합니다. 제도권 언론들이 권력과 유착해서 이런 불의를 저지르면서 반민주 반민족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꼴을 참다못해 육만여 시민들이 쌈짓돈을 털어 만든 것이 한겨레입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한동안 그런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에 부응해 진실 보도에 매진해 왔더랬습니다.
1988년 5월 15일자 한겨레 창간호.
한겨레의 창간은 한국언론(운동)사에서 매우 독보적이고 다양한 의의와 위상을 지닙니다. 주권적인 시민들과 결합해 민족 민주 민생을 지향하는 세계에 유례없는 국민주 형식의 독립언론을 직접 창출했다는 점에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언론운동사에서 유례없는 자유언론 실천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어 낸 일대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세계 유력한 매체들이 한겨레 창립 자체를 그런 측면에서 취재하고 보도했던 까닭입니다. 그만큼 한겨레는 자유언론을 넘어 민주언론의 DNA를 내장한 채 탄생했습니다.
한겨레는 명실상부, 자타공인 한국 언론자유의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러했던 한겨레가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DNA와 자신의 역사와 자신의 정체성에서 조금씩 조금씩 이탈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언론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과 태도에서 조중동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이르렀습니다. 가령 언론의 악의적인 허위 왜곡 보도를 규제하기 위해 도입하려는 소위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한 격렬한 반대, 뉴스타파나 뉴탐사, 민들레, 뉴스버스 등 윤석열 검찰독재와 투쟁하는 군소 독립매체들에 대한 권력의 명백한 언론탄압에 대한 무시나 외면 등은 그러한 조짐들입니다.
저는 한겨레가 초기의 창간 정신을 상당히 상실한 이유 중 하나가 철저한 자기비판 기능이 약화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겨레가 창간되면서 언론매체 비판을 한겨레의 주요 역할로 표방하고 나선 것은 한국 언론계에 신선한 충격과 놀라움을 불렀습니다. 언론이 다른 언론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때까지 한국언론이 묵수(墨守)해온 금기적인 관행이었습니다. 동업자 감싸기 의식이었지요. 한겨레는 여론매체부를 설치하고 타 매체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권언유착에 따른 언론의 역기능과 폐해가 극심한 상황에서 언론매체들을 취재보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시대적인 요구였다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한겨레의 매체비평은 그 공과에 대한 평가에 관계없이 언론보도의 또하나의 성역을 깼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일반대중들은 적어도 조선일보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언론계에서 매체 비평의 전범으로 꼽혔던 시민편집인 제도처럼 한겨레의 건강한 정신을 대변하는 장치가 없어진 것이 지금의 한겨레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 같아 못내 아쉽습니다. 한겨레가 이른바 민주당 ‘개딸’ 현상을 한국 정치의 중요한 변화로 인식하는 대신 단순한 팬덤 현상으로 폄하한다든가, 그런 열성 당원들의 요구를 당 개혁에 반영하는 리더십을 이재명의 사당화로 비방하는 것이라든가 최근 민주당의 국회 운영을 반쪽짜리 국회 운운하며 비판하는 것 등 변화하는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한겨레적인 배타성과 폐쇄적인 회로에 갇혀있기 때문 아닌가 추론해봅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검찰 애완견' 발언을 비판하는 한겨레 6월18일자 사설.
막장 드라마는 욕하면서 본다고 한다. 내게 한겨레가 그렇다. 한겨레에 실망하고 분노할 때도 있지만, 조선일보가 깃발을 들면 거의 모든 언론이 우르르 몰려가는 한국적인 언론 상황에서 한겨레마저 없으면 캄캄한 암흑 속에서 살 것 같아 손에서 한겨레를 놓지 못한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옛말이 있다. 말리는 척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양비론의 훈계와 훈수 늘어놓으며 매 맞는 며느리의 속을 뒤집어 놓는 시누이가 곱게 보일 리 없다. 내게 한겨레가 그렇다. 자유 언론을 지키려 했던 선배들이 왜 한겨레에 탄식을 쏟아내는지 한겨레 기자들은 깊이 생각하기를, 한겨레를 쌓아 올린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긴 의미를 한겨레 기자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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